[한국영농신문 이병로 기자] 

ESG 경영이 유행이다.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환경·사회문제·지배구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를 실제 경영활동에 반영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2일 발표한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ESG 준비실태 및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ESG에 대한 최고경영진의 관심도는 66.3%로 나타났다. ESG 경영의 구체적인 연간목표 수립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31.7%가 '수립했다', 39.6%는 '수립계획이 있다'고 응답했다. 반면, ESG 경영전략 수립에 있어 애로요인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29.7%가 'ESG의 모호한 범위와 개념'을 꼽았다.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난감한 기업들이 꽤 있는 듯하다.

ESG는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앞 글자를 딴 약자다. 과거 기업은 재무적 성과를 위주로 평가됐다. 하지만, 기업이 돈을 많이 번다고 그 부가 계속되리라는 법은 없다. 기업이 돈을 버는 과정에서 환경을 파괴하고, 협력업체를 착취하고, 폐쇄적으로 의사결정하면 결국 공동체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지속가능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ESG는 단순히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이를 경영활동에 반영해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라’, ‘착한 기업이 오래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ESG는 단순히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이를 경영활동에 반영해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사진=픽사베이]

한국판 ESG의 원조는 경주 최 부잣집이다. 그 가문이 본격적으로 부를 일구게 된 것은 11대조 최국선(1631~81) 때부터다. 당시 소작인들은 8할을 소작료로 내고 있었다. 가을 추수한 곡식이 떨어지는 음력 12월이면 지주에게 ‘장리‘를 썼다. 장리는 양식을 빌리고 두 배로 갚는 일종의 고리대였다. 당시 횃불을 들고 부잣집을 터는 ’명화적‘이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때였다. 최국선의 집에도 명화적이 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훔쳐 달아난 것은 식량도 아니고 장리 관계를 기록한 채권서류였다. 최국선은 이후 남은 장리 문서도 모두 돌려주고 소작료도 5할로 대폭 낮췄다. 소작을 하고 양식을 빌리는 사람들도 궁하게 되면 언젠가는 도적이 돼 자신을 해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1923년 전국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구호가 소작요율을 5할로 조정해달라는 것이었으니 300년이나 앞선 상생경영의 모범이었다. 

이후 최부잣집과 소작인들은 공생관계가 된다. 낮아진 소작요율 때문에 소작인들은 더 열심히 일했다. 특히 인근에 땅이 매물로 나오면 최부잣집에 달려가 알렸다. 최부자가 더 많은 땅을 확보해 낮은 소작료로 자신들에게 소작을 주는 것이 자신들의 수입을 높이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정보원 역할을 기꺼이 해주었다. 최씨 가문은 이렇게 차곡차곡 주변 땅을 사들이고 이앙법 등 새로운 농법도 도입하며 큰 부를 이루게 된다. 최부잣집은 육훈(六訓)을 두어 후손들을 가르쳤다.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이 그것. 돈을 벌어도 주변을 돌아보며, 욕심내지 말고, 드러내지 말고 하란 뜻이다. 

경주 최부자집 종택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현존하는 기업 중 착한 기업을 뽑으라면 유한양행이 대표주자다. 유한양행은 창업주 유일한이 1926년 경성부 종로2가에 ‘유한약방’이 시초다. 초기에 미국 의약품만 수입하다 1933년 '안티푸라민'을 시초로 국산 의약품 개발과 판매에 전념했다. 유한양행의 경영이념은 ▲우수 의약품 생산, ▲성실한 납세,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다. 기업의 경영이념에 납세와 환원이 들어간 것은 흔치 않다.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를 ‘공동체의 선’으로 명확하게 한 것이다. 그 유래는 창업자 유일한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던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이후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사업가 유일한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군인 경력도 있다. 1942년 CIA의 전신인 OSS(미육군 전략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 창설을 주도했다. 해방직전인 1945년 OSS의 조선수복작전인 '냅코(NAPCO)'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을 지냈다. 기업 운영에 있어서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의 결탁을 거부했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로는 가족 승계가 아닌 회사 임원에게 경영권을 일임했다. 산업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세상을 떠날 때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다.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석사,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에도 항상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다. 한국 ESG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하다. 

유일한 박사가 기틀을 닦아 놓은 유한양행은 지금도 직원중에서 6년 단임제로 전문경영인을 선발해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초 매일경제와 지속가능발전소가 국내 100대기업을 대상으로 ESG 경영을 평가한 결과, 유한양행이 67.2점으로 전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이런 미담만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반대 사례도 있다. 최근 한국마사회 김우남 회장의 직장 내 폭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13일 한국마사회 노조가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김 회장은 지난 3월 초 자신의 의원시절 보좌관을 비서실장으로 특채하라고 지시했다. 인사담당자가 국가권익위원회의 권고와 상급기관인 농식품부의 유권해석을 들어 채용이 어렵다고 보고하자, 김 회장은 해당 직원에게 심한 욕설로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여러 언론에 보도되자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한국마사회에 대한 특별 감찰을 지시했다. 결국 김우남 회장은 입장문을 통해 대국민 사죄를 하면서 "감찰에 성실히 임하고 감찰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에 맞는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ESG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인권과 경영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던 장면이다.

기업들은 착한 기업이 되겠다고 경연을 벌이고 있는데, 정부 산하기관은 아직도 사내에서 욕설이 난무하다니 놀랍다. 한국마사회는 작년에 이어 지금까지 코로나 19로 경마장을 열지 못했다. 2020년 매출 손실이 무려 6조 3천억 원에 달한다. 올해 7월이면 보유자금마저 바닥이 나 폐업 위기에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마사회는 위기 해결책으로 온라인 마권 발행을 들고 나왔다. 사행성이 높아진다는 우려에도 말산업과 축산업 발전기금 확보를 빌미로 여론 전환과 법 개정에 나서던 상황이었다. 

이번 김 회장 폭언 파문이 한국 마사회 회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 두고 볼일이다. 보궐선거 참패로 궁지에 몰린 여당과 정부가 사행성 높은 온라인 경매 시행에 손을 들어줄까?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다면 더욱 어렵다. 이번 일은 ESG 경영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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