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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이 지킨 ‘다시 만난 토종의 세계’
12월 20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토종씨앗 축제 '토종과 맛나다' 행사에 참여한 여성농민, 활동가, 소비자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다양성’이 사회 전반에서 화두라지만 사람들이 농작물을 떠올리는 이미지는 제한적이다. 사과는 빨간색 부사, 당근은 주황색, 노란색 옥수수. 한국인이 주식으로 먹는 흰쌀밥은 그나마 쌀이 ‘국산’으로 뭉뚱그려지지 않고 지역 브랜드로 분리라도 되어 있으니 이것도 다양성이라면 그렇다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소수의 품종으로 대표되는 농산물과 특상, 상, 중, 하와 같은 규격에 맞춘 크기와 품질. 어쩌면 우리 농산물은 뻔한 존재가 된 사이 소비자들에게 조금씩 외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여성농민이 모이는 자리는 특별하다. 12월 20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토종씨앗 축제 ‘토종과 맛나다’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토종 농산물이 전시되고 먹거리도 함께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손톱의 반의반도 안되는 작은 크기와 생김새가 꼭 쥐 이빨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지어진 쥐이빨옥수수를 튀겨낸 팝콘을 맛보면 우리나라 옥수수로 팝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기름과 소금 없이도 완성도 높은 고소한 맛에 누구나 놀라게 된다.

또 부여 여성농민 회원이 달큼한 흰색 당근을 무쳐낸 나물과 고창 여성농민들이 맷돌호박으로 쑨 호박죽을 맛본다면 나름 토종씨앗에 ‘베테랑’임을 자부하는 농부들도 “이건 처음 먹어봤다”는 감탄을 연신 내뱉는다. 

사포닌이 많이 든 흰색 당근은 볶았을 때 더덕이나 도라지에서 나는 단맛을 떠올리게 하고, 맷돌호박은 색이 곱고 풍미가 깊어 다른 조미료를 더할 필요 없이 호박 그대로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날을 위해 부여의 신지연 농부는 특별히 구억배추 묵은지를 내놓았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구억배추 특유의 톡 쏘는 알싸함과 토종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혀끝을 타고 올라가 두피를 짜릿하게 자극한다. 두피의 모공이 열리며 느껴지는 특유의 개운함은 그 맛을 본 이만 공감할 수 있다.

강원도 여성농민들은 토종 차조로 떡을 쑤어 나눴다. 홍천에서 토종 차조 농사를 짓는 선애진 농부는 강원도에는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이 이뤄져 조나 수수같은 밭곡식이 더 많다고 소개했다. 이어 “일제시대 때부터 밭곡식을 낮잡는 말로 ‘잡곡’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원래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어르신들은 늘 밭곡식이라 불렀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처럼 토종으로 한 상 차려낸 음식 앞에는 그 동네 어른들을 통해 내려오는 농사나 먹거리에 관한 진귀한 이야기보따리도 푸짐하게 곁들여진다.

토종씨앗 나눔 행사에 참여한 요리사커뮤니티 ‘븟’은 여성농민에게 받은 토종 농산물을 해석한 허머스와 양갱, 케이크같이 전례없는 메뉴를 선보이기도 했다. “제주 메밀은 보리처럼 식감이 데굴데굴 구르는 봉평메밀과는 달리 죽처럼 부셔지더라고요. 또 일반 생강은 수분도가 높아 즙을 내면 물처럼 빠지는데, 토종생강은 젤리처럼 빠지고요(최은희 요리사).” 저마다 눈을 반짝이며 익숙한 듯하지만 처음 접해보는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성농민의 토종씨앗 지킴이 10년

전여농은 2004년 전세계 소농 연합체 비아깜뻬시나(La Via Campesina)에 가입한 이후 2007년 비아깜뻬시나의 생물다양성위원회 동남동아시아 대표를 맡으며 종다양성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개방농정에 관한 반대 투쟁으로 대표되었던 전여농의 활동은 이 일을 계기로 확대된 것이다. 이후 전여농의 여성농민들은 식량주권·농생태학·토종종자·지속가능한 농업 등의 대안을 찾으며 토종씨앗을 지키는 행사를 해왔으니 이번 축제로 10년이라는 역사가 쌓였다.

전여농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에서 토종실태조사를 시작해 제주, 함안, 임실, 무안 횡성에서 책과 자료집을 냈다. 2009년에는 여성농민 ‘1농가 1종자 지키기’ 사업을 진행해 한 품종이상 토종농사를 짓고 씨앗을 갈무리하는 여성 농민을 모집했고, 2010년에는 안완식 박사로부터 기증받은 600여 토종씨앗을 중앙과 지역으로 배포하면서 이듬해 그 운동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

2008년에는 농진청의 지원을 받아 제주에서 토종종자전시채종포 운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채종포는 2009년 농진청의 지원으로 정읍, 음성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아름다운재단, 행복중심생협과 지자체의 지원으로 전국에서 총 16개의 채종포가 운영되고 있다(2017년 12월 기준). 토종종자전시포는 지역에서 종자주권의 중요성을 알리고, 각 지역에서 여성농민의 종자 지키기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이후 제주도는 토종채종포사업을 계기로 실태조사사업을 이어나갔고, 토종 작물을 조직적인 차원에서 생산하고 우리먹거리사업단이라는 브랜드를 구성했다. 홍천과 횡성은 행복중심생협과 공동채종포를 운영하며 소비자,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렇게 여성농민 개개인과 지역, 넓게는 소비자와 함께 지켜온 그 씨앗이 전여농에서 매년 토종축제에서 선보여지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토종씨앗을 이어온 전국의 여성농민 뿐 아니라 활동가와 전문가, 소비자도 함께한다. 농사와 먹거리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 1년간의 토종종자 사업을 평가하고, 성과를 축하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다.

전여농 토종씨앗 축제 행사에서는 ‘아름다운 토종 지킴이상’을 시상하며 여성농민의 활동을 격려하기도 한다. EBS '지식채널e'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그 씨앗 속에는 씨앗이 있을까?’에 나오는 많은 할머니들의 토종씨앗 이야기의 토대가 된 횡성군 여성농업인지원센터의 활동이 선정되었다.

횡성군 여성농민회 한영미 농부가 소장을 맡은 횡성군 여성농업인지원센터에서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횡성군에 전해 내려오는 토종작물 82종의 403가지 토종 씨앗을 찾았다. 이어 2017년 6월에는 횡성에서 토종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심고 가꾸는 법, 수확하는 법, 먹는 법을 기록한 책 ‘횡성에서 살아온 토종씨앗들’도 냈다. 

또 전여농에 토종씨앗지키기를 제안하고, 10년의 역사를 함께해 온 원광대학교 김은진 교수도 함께 토종씨앗 지킴이로 선정되었다.

 

12월 20일 전여농 토종씨앗 축제에 전시된 토종목화
12월 20일 전여농 토종씨앗 축제에 전시된 토종 당근과 배추, 파

 

씨앗 한 톨에 담긴 농부의 ‘우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작은 씨앗 한 톨이지만, 그 안에는 그 씨앗에 얽힌 모든 이의 역사가 담겼다.

“수확은 적지만 그저 식구들 먹이려고 짓던 토종씨앗. 어릴 적부터 먹었던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씨앗을 보관해 오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토종씨앗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종자를 지키는데 강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횡성 여성농업인센터).”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돌까리 포대나 밀가루 자루로 주머니를 만들어서 천장에도 처마 끝에도 주렁주렁 달아놓으셨습니다(경북 의성 권윤자 농부).”

“날씨 때문에 종자를 수확하지도 못하고 비둘기나 새들이 와서 종자를 다 까먹어서 수확을 하나도 못 할 때도 있었고, 종자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이 세월이 갈수록 느껴집니다(제주 김미랑 농부).”

“씨앗이 있으니 그냥 심는다”는 증언에는 채종을 하는 활동이 이들의 순환적 생활 속의 일부로 자리 잡아 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2016년에는 세상을 떠나거나 병으로 쓰러진 할머니들을 보며 씨앗과 씨앗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중요성을 재확인하기도 했단다.

소수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농산물과 먹거리 뒤에 크기가 작아서, 수확량이 많지 않아서 같은 ‘상품성’의 이유로 재배를 포기한, 그래서 사라지거나 잊힌 수많은 품종이 있음을 확인했다. 모두 ‘옛맛’이라는 추억으로 한데 묶여 급속도로 사라지는 중이다. 

그럼에도 발굴돼 다시 선보여진 토종종자 그 속에는 맛도 모양도 전부 다른 누군가의 취향이, 자식이나 가족이 좋아해서 남겨두고 이어왔다는 누군가의 애정이, 누군가의 비법이 담겨있다. 경북 고령의 서숙경 농부가 기른 토종 앉은뱅이 통밀 국수로 요리한 요리사의 말을 빌려 전하자면, “(전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다.

 

이아롬 기자  arom@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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