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던 ‘농안법’이 국회 농해수위를 통과했다. 정식 명칭이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인 이 법은 농산물 유통 체계의 골격이 되는 도매시장 개설과 운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농수산물 유통 전문가들은 도매시장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견으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 요점은 “도매시장의 독과점의 피해로 산지 농민은 싸게 팔고 도시민은 비싸게 사먹는다”와 “아니다. 그나마 도매시장의 경매를 통해 거래 가격이 투명해져서 농민들이 제값을 받을 수 있다”로 나뉜다.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의원은 현행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장도매인제’ 자율도입을 핵심으로 한 농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도매시장을 거치지 않고 산지와 직거래를 할 수 있는 ‘시장도매인’을 둘 수 있는 권한을 도매시장 개설자인 지자체에 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20일 농해수위를 통과한 개정안에는 시장도매인제 자율도입 부분이 빠졌다. 이 제도의 적정성 유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 체재를 유지하려는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임은 분명해 보인다.

농산물 유통을 조금이라도 혁신해보려던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다음 총선으로 구성된 새로운 국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될지 모르겠다. 그 때가 되면 유통의 환경은 지금보다 더 변해 있을 것이다. 모바일의 결제는 더욱 쉬워질 것이고, 콜드 체인 등 물류 기술도 더 싸게 제공될 것이다. 일인 가구도 늘어나고 주 52시간 정착과 최저 임금의 상승으로 ‘투잡’에 나선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잔뜩 장을 보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 시간이 없다. 이 때문에 음식을 배달해주는 온라인 플랫폼도 더 성장할 것이다. 매년 ‘조‘ 단위의 적자를 투자로 메우고 있는 쿠팡 같은 온라인 유통 채널들은 수익성의 한계로 고민 중이다. 레드오션인 의류나 전자기기 같은 일반 공산품에 비해 막 시작하고 있는 농산물과 식품을 돌파구로 생각하고 판매 방법을 고도화시키려 할 것이다.

최근 뜨고 있는 HMR 시장을 보자.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HMR 시장규모는 작년 3조2000억 원대 시장에서 2022년에는 5조원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자 가격의 대략 30% 내외가 주재료비 비중라면 2022년에는 1조 5천억 원의 새로운 농식품 유통 시장이 생기는 셈이다. 이들이 재료를 구매할 때 느끼는 불편함이나 수익성을 개선해주면서 우리 농민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 봐야 할 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HMR 시장규모는 작년 3조2000억 원대 시장에서 2022년에는 5조 원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마이셰프]

HMR은 가정식 간편식을 말한다. 도시락이나 죽 같은 완제품에서부터, 최근에는 손질된 요리 재료를 포장해서 제공하는 ‘밀키트‘ 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한 밀키트 제조사는 재료의 90% 가량을 국산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제품의 고급화를 위해서 그렇다고 한다. 아울러 이 회사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농가들이 소비환경 변화를 정확히 알고 우리처럼 소비의 끝단에 있는 식품제조업체와 손잡고 파종단계 때부터 기획한다면 판로걱정 없이 농사를 지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민간 기업이 우리 나라 농민 생계까지 걱정해 준다. 참 고마운 충고다. 

HMR의 성장세를 보면 변화하는 농산물 유통 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간편하게 챙겨 먹고 싶어 한다, 구매는 온라인으로 한다, 이런 서비스를 하는 제조-유통사는 거대 자본들의 투자를 받고 무럭무럭 성장할 것이다 등등.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시장과 맞서지 마라라는 투자 격언이 있다. 기업이든 정부든 고객의 변화를 읽고 따라가야 한다는 교훈이다. 변화하는 농산물 소비-유통의 거대한 물결에 올라탄 세력은 성공하고, 맞선다면 침몰하게 될 것이다. 뭔가를 바꿔보려고 추진했던 ‘농안법’이 알맹이는 쏙 빠진 상태로 통과된 2019년 국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이다.  

농안법이 바뀌던 말던 들판의 농부들은 내년 농사를 위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래도 내일은 태양이 떠오른다”는 스칼렛 오하라의 대사가 떠오른다. 농민들은 왜 늘 내일이 좀 더 나을 거라는 희망 고문을 당하며 살아야 할까? 그런데 확실한 게 있다. 시대는 변하는데 지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면 가락시장이든, 이마트, 농협이든 한 때 지구를 호령했던 공룡처럼 박물관의 화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라는 얘기다. 앞서 말한 모바일과 유통 기술의 혁신, 소비자 행동의 변화를 대비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스마트한 리더십은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그걸 기대하며, 오늘도 농부들은 추위에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새벽녘을 연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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