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초의 약속 이행하고,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임을 명심해야

여자 배우 한 사람이 은퇴를 암시하는 글을 SNS에 올렸더니 금세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오르는 세상. 그녀는 “그동안 힘들었다. 이제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라며 사실상 조만간 은퇴할 것 같은 분위기를 띄워가고 있다. 정말 그럴까? 네티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은퇴여부와 시기를 점치고 있다. 2018년 봄이라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십여년 넘게 이어져온 인터넷세상의 한 컷일 뿐이다.

그냥 지나치기 힘든 풍경도 있다. 농림축산식품 관련 업계에서도 최근 은퇴 아니 사퇴가 잇따랐다. 농업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잘 알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이름조차 잘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릴레이 사퇴는 농업계라는 ‘버려진 찻잣 속의 태풍’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잘 나가는 정치판의 흔한 풍경’일 수도 있다. 그들은 누군가? 농업 정책의 핵심 컨트롤타워인 농림축산식품부 김영록 장관, 청와대 신정훈 농어업비서관 그리고 이재수 선임행정관 등 3인이다.

이들은 각각 전남도지사와 춘천시장 출마를 위해 맡았던 일을 그만두고 사퇴한다며 정치판으로 돌아갔다. 농업관련 언론이 아닌 일반 언론들은 이들이 ‘선거를 위해 공직을 사퇴했다’라고 점잖게 보도했지만, 농업.농촌과 함께 하며 농민들의 입과 마이크 역할을 하는 농업 언론들은 그럴 수만은 없다. 유감에서 시작된 감정변화는 걱정을 넘어 허탈함, 화남,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음 등등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 아닌가? 농정 컨트롤타워가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묻고 싶다. 문재인 정권은 정치판만 키우고 소는 안 키우나? 소 키워야 할 사람들을 정치판에 차출해서 대체 뭘 키우려고 그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6.4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우리는 현재 농업.농민.농촌을 대하는 현 정부의 마음가짐, 즉 철학의 부재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10개월만의 일이다.

선장도 기관사도 항해사도 없는 배가 풍랑을 만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우리 농업을 흔한 말로 ‘운칠기삼’, 즉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방치하는 것은 아닌지 매우 걱정이다. 장관이 8개월 만에 바뀌어서 단명이라는 둥, 인사청문회를 거쳐야하는 신임장관 임명까지 몇 달이 걸릴 거라는 둥 말도 많지만, 사실 걱정할 일은 임기를 1년도 못 채울 ‘대타 장관’이 아니라 산적한 농업현안들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새 정부의 농정개혁 추진 동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고 검증하고 비판해야만 한다. 농업가치 헌법 반영, 한미 FTA 개정협상 대응, 쌀 생산조정제, 무허가 축사 문제, 농촌 소멸.해체.공동화 문제 등등 농민의 생존이 걸린 농정 현안에 현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확대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들이대야 한다.

“얼마나 농민이 만만하면 이럴까 싶다”라는 게 농촌의 보편적 정서라는 점을 문재인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정치가 최고선이며 능사는 아닐 것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아래쪽을 적시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은 오산일 수 있다. 농민과 농촌이 언제까지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만 기능하지는 않을 것이 때문이다.

때마침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도 성명을 내고 “문재인 정부의 핵심 농정공약의 추진 동력이 약화될까 걱정된다. 특히 쌀 목표가격 재수립, 중장기 직불제 개편 방안, 생산조정제를 비롯한 쌀 수급·가격안정 정책을 포함해 한미 FTA 개정협상 대응, 미허가 축사 적법화 추진,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 반영을 위한 헌법 개정 등 당면 농정 현안들의 대응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라고 매우 온건하게 에둘러서 현정부를 질타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성명에 적시된 것보다 훨씬 격렬했으리란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어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등도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임기를 10개월도 채우지 못하는 인사들이 농정의 핵심에 배치되고, 그들의 임기가 자신들의 판단으로 정해지는 행태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는가”라며 “농정 인사실패를 인정하고, 대통령은 농어업특별위원회 설치 공약을 즉각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한마디로 애초의 약속을 지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정부는 정치판만 키우지 말고, 농촌과 농업을 키울 일에 온 정성을 다 쏟길 바란다. 왜 그런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이다.

백종호 기자  bjh@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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