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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눈 내리는 아침 / 김정열

딸아, 아들아~

아침에 “눈이 왔어.”라는 네 아빠의 말에 창문을 열고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당에, 앞산에, 이웃집 지붕에도 소복이 쌓인 눈에 엄마는 기뻤다.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나도 모르게 지난 늦여름에 봉숭아 물을 들인 내 손톱을 쳐다본 것.

너희도 아직 남아있니?

 

장독대 위에 내린 눈이 정갈하다. 장작더미에 내린 눈은 따뜻하다. 마른 국화잎에 내린 눈은 포근하다.

눈이 내리면 설레는 너희들처럼 엄마도 가슴이 설렌다.

눈에는 추억에 잠기게 하는 마술이 있어.

예전 30~40년 전쯤의 일도 또렷이 기억나게 하는 마술, 그때는 눈이 더 자주 왔던 것 같아. 겨울이면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했던 기억이 많이 나.

엄마의 동생과 엄마의 아버지는 겨울마다 나무로 밀대를 만들어서 길가의 눈을 치웠지.

눈사람한테 새 목도리와 새 장갑을 걸쳐 놓아 어릴 적엔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혼났던 일이 있었다.

이런 별 것 아닌 기억들이 내리는 눈과 함께 내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오늘은 눈이 제법 많이 내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며칠 동안은 꼼짝을 못 할 것 같다.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길이 빙판이 될 거야.

하지만 일부러 느긋이 차를 마신다. 이대로 얼어붙어 당분간 꼼작 못 하는 시간을 상상해본다.

오지도 가지도 못 할 오직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열릴 거야.

내 몸은 갇혀 있겠지만 어쩌면 내 마음은 더 날개를 펼지도 몰라.

차를 타고 서울로, 부산으로 다녀도 채워지지 않을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어쩌면 갇혀있는 내 오두막집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는 행복한 아침이다.

눈 내리는 세상은 고요하다. 눈이 세상의 소음을 다 잡아 먹었다.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엄마는 이렇게 좋았다.

내일 당장 길이 얼어붙어 이런저런 약속을 못 지키더라도 이 눈을 치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큰길의 눈을 쓸고 있는 소리에 조바심이 났다. 동네 어른들이 큰길의 눈을 치우고 있다. 차가 다녀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얼어붙은 길을 원망하고, 오늘 내린 눈을 원망하더라도 지금은 눈을 치우고 싶지 않았지만,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서둘러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러 일어섰다.

동네 어른이 눈을 치우는데 보고만 있을 심장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산 것 같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이렇게 살라 말하지는 않겠다.

너희들에게 아직 내가 어른일지라도.

 

김정열 / 비아캄페시나 국제조정위원

경북 상주에서 농사짓는 농민. 농촌에 사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한국영농신문  arom@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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