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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농칼럼] 성공한 농사꾼 / 서희정

그녀는 늘 미소를 머금고 다녔다. 사람들의 말에 맞장구도 잘 쳤다. 얇은 눈꺼풀이 처져 있어 그 모습이 사람 좋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은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순종적인 듯 다소곳했지만, 배포만큼은 컸다. 그녀의 그런 성품 때문인지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10년 전쯤이었을까. 시골에서는 쯔쯔가무시병이 발병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남편도 그 병에 걸렸었다. 당시 의사들은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거뜬히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지극정성 덕분이었단다. 그 일이 있고부터 그녀 남편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솔직히 그는 평소에 자기 아내한테 부드럽게 대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술도 끊었다. 의사가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란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집은 불꽃 일어나듯 했다. 그는 지금 고구마 농사만 몇 십만 평 짓고 있다. 농사를 지어 직접 자기 화물차로 운송까지 한다. 그러면서 농산물 시세 파악과 투자 작목 선택에 많은 도움을 얻은 듯하다. 게다가 그의 아내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늦게 운전을 배웠지만, 운전을 잘한다. 수십 명씩 되는 인부들도 잘 이끌어 간다. 그야말로 웬만한 일꾼 못지않다. 몇 년 전에 우리 남편이 그랬다. “○○엄마 강원도에서 4년대학 나온 사람이야. 인터넷도 잘 다루고 판매도 잘한다네.”

 그녀는 늘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한다. 농사가 많아 인부들이 많게는 100여 명 가까이 올 때도 그 인부들 비위를 잘 맞춘다. 음식 또한 아낌없이 내놓는다. 남편 친구들끼리 노래방을 가도 선뜻 그 비용을 지불하곤 한다. 그녀의 남편이 농사에서 그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덕분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우연히 농민신문에서 그녀 남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에 대한 글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억대 부농 ○○○”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으로 그녀를 봤다. 흙 묻은 작업복 차림에 고무장화를 신고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반백의 머

리가 엇듯 보면 할머니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그녀를 본 것은 부부동반으로 태국 여행 갔을 때다. 갈색으로 며리 염색하고 말끔히 차려 입은 그녀의 모습이 전혀 딴 사람 같아 보였다. 보석가게에서 딸들에게 줄 목걸이를 고르며 행복해 하던 그녀. 어리숙한 듯 주눅 들어 보였던 예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지내느냐 안부를 물었더니 그녀가 한마디 했다.

“요즘엔 내가 대장이에요.”

그녀는 시원하게 한바탕 웃더니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즈음 우리 남편은 인생한방을 노렸다. 그러나 그것은 교묘하게 그를 빗겨나갔다.

그의 주변엔 불행의 그림자만이 감돌았다.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농기계를 능숙하게 잘 다뤘다. 그때 남편이 그 일만 성실히 했더라도 빚진 삶은 아니었을 게다. 하지만 그는 빚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또한 술과 친구를 너무 좋아했다. 자기의 급한 일은 제쳐놓고 남의 일을 돕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좋아했지만 그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미래는 쪼그라든 채 골방에서 기침을 해댔다.

“어려운 사람이 누구를 도와.”

진정스승님이 정법강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또한 일이 안 풀릴 때는 남의 말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남편은 늘 자기 고집대로만 했다. 주변사람들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일은 늘 잘 되는 듯 틀어지기 일쑤였다.

농사도 운이 따라야 한단다. 하지만 그 운조차도 머물고 싶은 곳은 따로 있을 것 같다. 체면치례 좋아하고 허세부리며 헤픈 사람을 어떤 운이 좋아하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하기 좋은 말로 쉽게 말한다.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 뭐.”

하지만 막상 농사를 지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작물선택에서 제초작업, 인부관리, 판로까지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시 남편 친구가 크게 성공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나 그는 처음부터 소비자를 바르게 읽고 있었다. 또한 화물을 하면서 농산물 시세를 피부로 느꼈으리라.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아내가 그의 옆에 있었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농사는 부부가 한뜻으로 움직여야 한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갖고 한 방향으로 갈 수는 없지 않던가.

나와 남편은 그 점에서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제초제 하나만 해도 그렇다. 그 해악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조언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세상물정모르는 철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물론 그런 남편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그만큼 제초 작업은 힘들고 그 노고의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성공한 농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인생의 성공이 돈 만은 아니듯 성공한 농부라면 이념하나쯤 가져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겠다.’는 이념만이라도...,

사실 농사를 지의며 갈등할 때가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제초제 사용과 쓰레기 소각이 그랬다. 농사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 부분도 미리 생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랑으로 이룬 부농]

 

그의 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손과 발이 뒤틀려 있었다. 집안은 그런 대로 살만했다. 하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자는 없었다. 그래서 굶어 부황든 가난한집 딸 즉 그의 어머니가 시집을 온 것이다. 시부모는 행여 며느리가 도망이라도 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단다. 그 덕분에 시부모가 살아 있을 때만해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살았단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자 가산은 급속도록 기울기 시작했다 한다. 그의 아버지는 어차피 심한 장애로 농사일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 또한 집안일만 하며 살아온 터였다. 그러다 보니 있는 재산 다 잃고 구걸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단다. 가난한 집에 자식은 많아 딸 하나에 아들만 여섯인 그 집. 그래도 그 사람들 심성하나는 착했다.

 

그의 누나는 우리 큰언니와 친구고, 그의 형들은 우리 오빠들과 친구여서 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 또한 그들 가족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에 음식을 아낌없이 내왔다.

그 집 큰아들은 입 하나라도 덜기위해 월남전에 갔다. 나머지 자식들 또한 간신히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모두 집을 떠났다. 하나둘 서울로 가서 정착을 했던 거다. 그중 유독 다섯째인 그 오빠만 시골에 남았다.

그 역시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다. 그 집 주변엔 제법 큰 밤나무가 세 그루 가량 있었지만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생각하면 그네들이 그 나무를 관리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대가로 손바닥만 한 텃밭을 벌지 않았나 싶다.

 

그는 착실하고 근면성실해서 동네사람들 사이에 신임이 두터웠다. 그의 그 성품을 좋게 생각해 누군가 동네 중매를 섰다. 여자는 윗마을에 사는 임씨 집안 딸이었다.

그 집엔 아들 둘에 딸이 넷이었다. 그녀는 그중 셋째 딸이었다. 흔히 셋째 딸은 선도 보지 않고 데려 간다는데 그녀의 인물은 딸들 중에 제일 빠졌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걸걸했다. 어렸을 때 그녀에 대한 기억은 늘 코를 훌쩍거렸던 모습이다. 공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녀에 비하며 그 오빠가 인물은 훨씬 나았다. 얼핏 들리는 소문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단다.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동네장가를 갔다.

 

나는 남편이 하던 일이 여의치 않아 친정동네에서 10여 년간 산적이 있다. 그때 한 2년간 구멍가게를 했었다. 그녀와는 두 살 차이여서 친구처럼 지냈다. 그녀는 딸만 내리 넷을 낳았다. 그 때문에 시어머니의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노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고부간의 갈등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기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남편을 위해 따뜻한 밥과 국을 꼭 준비한다는 그녀. 제사 때도 싫은 내색 없이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듯했다. 그녀는 다섯째 며느리였음에도 맏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 그녀였지만 어느 날은 안 되겠다 싶어 각자 얼마간의 돈을 내라 했다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녀가 물렁한 여자가 아님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는 느리고 게을러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무슨 일이든 척척 잘 해냈다.

산 밑에서 살던 그녀의 시부모는 자식 덕에 동네 중앙으로 이사를 왔다. 언젠가 그녀 시어머니는 우리 친정집에 놀러와 며느리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동안 딸만 낳은 며느리를 미워했는데 그 손녀딸들이 효도를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며느리를 드리면서 집안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기계소리는 늦은 밤에서 새벽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벼와 보리 탈곡을 한 뒤엔 소여물을 포장했다. 그는 술 담배는 일체 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로지 일과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찌 보면 답답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맨바닥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리해야 했으리라. 어쨌거나 그처럼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는 부자가 되었다. 처음엔 기계를 하나둘 사들이더니 나중에는 농지를 사들였다. 동네농지에서 타동네 농지까지 그 범위를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그가 그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남편을 그처럼 극진히 대하는데 어느 남자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는 농기계를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네일만 하다가 나중에는 그 일대 일을 거의 도맡아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라.”

나는 그 말에 백번 공감한다. 사랑 없는 결혼.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결혼이고 불행한 미래를 예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농사를 생각한다면 배우자 선택을 잘해야 한다. 만약 배우자가 농사를 싫어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일이다.

진정스승님은 배우자감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여자는 무조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30% 더 갖춘 남자를 만나라.”

그래야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남자는 자신보다 30%쯤 부족한 여자를 만나야 한단다. 그렇게 되면 그 부족한 부분을 이끌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예쁘고 똑똑한 사람만 욕심낼 일은 아닌 것 같다. 특히 농사는 힘들고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배우자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일이다.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그 한사람 얻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혹 부농이 되지 못한다 해도 행복한 삶은 성공한 삶은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 영광 오일장에서 만난 그녀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딸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장을 누비던 기미낀 얼굴의 그녀. 그녀는 너무도 당당했다. 

 

서희정

탐스런 문학회 회원

 

고모령 효예술제 문학상 수상

지구사랑문학상 수상

충주문학관 문학상 수상

 

한국영농신문  agrienews@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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