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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농칼럼] 아! 그리운 나의 고향이여! / 배수자

나는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고향이란 단어, 고향이란 노래, 고향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염없이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추억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내 고향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 자리 잡은 논농사 지방의 지역이다. 마을 은 높은 앞산과 마을 뒤의 낮은 산으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뜻한 마을이다. 마을은 모두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을 언덕을 넘으면 S자 모양의 강이 보인다. 강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사람들은 강 상류에서 낙화하며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가 멍멍해져서 정신을 잃곤 한다. 강물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의 하구에는 앞산 귀퉁이가 배불 떼기처럼 툭 튀어 나왔는데 강물은 모두 여기서 한 번씩은 쉬었다 흘러가곤 한다.

신작로를 달리는 완행버스의 ‘빵빵’ 거리는 경적 소리가 신기하여 집집마다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신작로에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크기의 자갈들이 깔려 있었다. 군데군데 웅덩이가 있어 비가 올 때면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신작로 양쪽으로 버드나무가 띄엄띄엄 줄을 서서 도보로 5일장을 보러가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는 고마운 나무였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가족은 정말로 행복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아버지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매일 앞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만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6남매는 좁은 방 한 칸에서 사계절을 생활하게 되었다. 겨울에는 방 한 칸이 더욱 따뜻하면서도 방이 넓게만 느껴졌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보리와 벼의 이모작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서 남의 논을 소작하고 있었다. 재산이라고는 집 앞에 백오십 평 되는 밭과 얼마 되지 않는 논이 전부였다. 우리는 공부보다는 먹는 게 더 중요했다. 어머니는 사철 나물밥을 주식으로 해주었다.

특히 봄에는 나물밥과 무밥이 자주 올라왔다. 봄 나물밥은 향긋한 향기를 내뿜으며 맛이 좋았다. 그러나 사계절 내내 먹는 무밥은 목구멍에서 멈추어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몰래 뒤돌아서서 뱉어내기도 한 적도 있었다.

어느 겨울날 저녁때가 되어 나는 전날 결석을 하여 숙제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위해 송희라는 친구 집에 갔다.

마침 송희 집에서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송희는 만석군 딸이다. 항상 흰 쌀밥에 갈치 고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거렸다.

“수자야, 너 저녁 먹었니?”

“어…….응!”

나는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저녁을 안 먹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송희 어머니는 얼른 쌀밥을 손바닥에 담아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송희 집에 자주 가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였다. 쌀밥을 얼마나 오랜만에 먹어보는 걸까?

초등학교에 2학년 때 일이다. 나는 옷이 단 한 벌 뿐이었다. 아침에 입고 저녁에 빨아서 밤새도록 말려야만 그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아랫마을 미숙이네 집에 가서 일을 해주기로 했다. 미숙이가 입던 드레스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볏단을 모을 때는 어른의 한 몫을 하였다. 볏단을 아이의 베개 크기만큼 짚으로 묶어서 논의 한 곳에 모아야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탈곡기에 볏단을 올려놓으면 벼 알이 떨어진다. 나는 탈곡기 뒤편에 던져진 볏단을 멀리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잠이 쏟아지는 날에는 볏단에 파묻혀 잠이 들곤 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나는 볏단에 눌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은 윗마을 철구네 묘사 날이다. 철구네 가족들이 묘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지게에 지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세 살 난 여동생을 업고 사람들의 뒤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따라갔다. 나는 묘사가 끝날 때까지 배고파서 보채는 동생을 달래며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철구 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찰떡 1개, 손가락 굵기의 돼지고기 1개를 내게 주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몫을 받았다. 묘사 떡을 먹는 날은 행운이었다.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이웃집 보리타작 품팔이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갔다. 나는 보리논에서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보릿단을 모으는 일을 했다. 갑자기 보리수염이 나의 옷을 파고들었고 얼굴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나는 보리논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반나절만 품팔이를 하게 되었다며 나를 꾸짖었다. 보리수염이 땀과 섞이면 더욱 가렵다. 나는 1주일을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도로에는 반짝이는 불빛과 높은 빌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어우러져 길거리에 울러 퍼지는 캐롤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런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생만을 했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릴까? 뿌리 없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고향은 내 뼈와 살이 생기고 그 뿌리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아! 언제나 그리운 나의 고향이여!

(시인, 문학박사, 수원 영덕초 수석교사)

한국영농신문  agrienews@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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