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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9주년 기념사] 심상치 않은 국제 정세 속 한국 농업의 길먹고 사는 문제에 이념 있을 수 없어... 농업이 정치의 흥정 대상 되서야
농업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생존이 걸린 중대사다. 사진은 '양곡관리법'이 논의되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 [사진=신정훈 의원실]

[한국영농신문 이병로 기자] 

지난해 2월 러시아가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세계인들은 21세기에도 무력으로 타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비문명적 전쟁행위에 분개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이 각계각층에서 나오고 우크라이나를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성금을 모으고 옷가지와 식료품을 기부해 피해국 우크라이나에 보내줬습니다. 딱 거기까지.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떨어진 유럽의 어느 곳에서 일어난 비극이었지, 우리가 당사자가 될 수도 있음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의 통신사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나 학살, 심각한 전쟁법 위반 등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인도적·재정적 지원만 고집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이터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살상 무기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기로 한 지 1년여만의 일”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즉각 반발이 나왔습니다. 로이터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게 된다면, 군사적 충돌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크렘린궁 대변인의 발언을 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우리 군이 보유하고 있는 155밀리 포탄 50만 발을 대여하고 추후 생산분을 사서 갚아준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21일부터 국내 주요 언론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미국이 한국군에게서 빌린 포탄 중 상당량을 포탄이 부족한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담은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러시아는 한국을 참전 적국으로 간주할 개연성이 커졌습니다.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커집니다.

전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자원을 소모합니다. 가장 먼저 사람의 생명이 소실됩니다. 다음은 각종 구조물과 전쟁 장비들이 파괴됩니다. 신속히 복구하고 생산, 보급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군인과 국민을 먹일 수 있는 식량도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전쟁수행능력’이 승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쟁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전쟁수행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무관심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 재의 끝에 자동 폐기됐습니다. 일부 여당 지지자들은 “쌀이 남아도는데도 세금으로 사줘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 법을 주도했던 민주당을 ‘포퓰리즘 정당’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집권당이 무책임하게 대안도 없이 반대한다"며 맞대응에 나섰습니다.

이 법의 취지는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초과 생산분을 정부가 매입하도록 해 쌀 수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정치 쟁점화되자 논의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민주당이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법을 강행 처리한다,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민주당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거부권을 행사한다며 각 당은 지지자들을 부추겼습니다. 결국 쌀 수급 해결 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라지고 여야 정치 싸움에 불쏘시개만 되고 말았습니다. 농업계도 찬반으로 나뉘어 두 동강이 났습니다.

늘 봐왔던 풍경이지만 이번에는 허탈한 마음이 더 큽니다. 중요한 전략자산인 식량,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자급에 성공한 쌀을 다루는 정치인들의 태도가 실망스럽습니다. 러시아, 중국을 향해 강경 일변도의 돌직구를 쏟아내는 정부입니다. 기존의 균형 외교 정책을 버리고 미국에 더 밀착해서 전쟁 억지력을 키운다는 전략입니다. 당연히 중국, 러시아의 반발이 연달아 나오면서 거친 언사들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전쟁 위기가 높아가고 있는 지금, 정작 전쟁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태 정치재로 보던 쌀을 포함한 식량을 이제 시장재로 볼 것인지에 대한 우리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식량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할 국가 존속과 안보에 꼭 필요한 상품이라는 게 전자입니다. 반면, 자유로운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가장 합리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생각은 후자를 반영합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후자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하면 자유로운 시장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코로나 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수년간 쌀값이 떨어져 쌀 재배면적이 줄어드니 도리어 가격이 폭등했던 게 2020년의 일입니다. 당시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오르게 됐다는 유언비어가 나돌 정도였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옷은 없어도 삽니다. 있는 것을 고쳐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식량은 없으면 죽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정치 불안의 첫번째 원인은 식량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 세대들은 식량을 자급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2020년 기준 쌀 자급률 92%입니다. 자랑스러운 성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를 잊으려 합니다.

어느 때보다 불안한 시대,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이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야가 정치 싸움을 벌일 여유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식량을 확보할 방법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K-방산’이라고 불리며 주식시장에서 블루칩으로 주목받는 방위산업 기업들도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적자를 보전해가며 키워왔습니다. 앞서 말한 전쟁수행능력을 고도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국민 모두가 농업을 ‘안보재’로 여기고 성장시켜야 국가의 안위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농업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생존이 걸린 중대사입니다.

저희 한국영농신문이 올해로 창간 29주년을 맞았습니다. 저희는 한국 농업이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미치는 영향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가치를 확대하는 데 필요한 대안을 찾아보고 제시하겠습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고언 부탁드립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저희를 키워주시고 지지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강과 행운이, 독자 여러분들과 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영농신문 직원 일동 드림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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