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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던 후남이가 바라는 건 똑같은 대우일 뿐이다삼성의 대규모 투자와 일자리 만들기... 농어촌상생기금의 초라한 성적과 대조

[한국영농신문 이병로 기자]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92년 MBC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종방 후반에 시청률이 60%에 육박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남아 선호와 여아 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쌍둥이로 태어난 아들 ‘귀남’(貴男)과 딸 ‘후남’(後男)이 주인공이다. 아들 귀남의 성공을 바라며 딸을 무시하는 어머니의 독한 언행이 늘 화제가 됐다.

후남이는 귀남이에게 늘 차별 당했다. 심지어 후남이는 딸이라는 이유로,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 귀남의 생일상을 차려야 했다. 온갖 설움을 딛고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을 입학한 후남이는 축하는커녕 “아들 귀남의 앞길을 막을 년”이라는 독설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가 애닮아 하는 건 대학에 떨어진 귀남이 뿐이었다. “예전부터 장원급제는 한집에 한명만 나오는 법인데 후남이가 합격해서 귀남이가 떨어졌다”라는 논리는 정녕 해괴했다. 어머니의 눈에는 딸은 장남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당해야 하는 부엌데기에 불과했다. 

그 시대의 아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장남은 온 가족의 기대와 지원을 받았다. 대부분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 장남의 출세를 위해 부모와 형제들의 희생은 당연했다. 부모는 논밭에, 소까지 팔아 아들을 공부시켰다. 나머지 형제들은 부모님과 농사를 짓거나 각자 알아서 살아야 했다. 그럴 때 자주 동원된 핑계는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잘된다”, “여자는 시집가서 살림할 거니까 배워봐야 소용없다” 등이었다. 여기에 “똘똘한 놈에게 모든 걸 몰아주자, 그러기 위해 나머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도 등장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아들은 부모의 도움과 형제들의 희생을 고마워할까? 보답하려고 할까? 오히려 “나의 성공은 내가 잘나서 그런 거고, 부모님과 동생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야지 내가 특별히 도와줄 것은 없다”라고 한다면 그 태도는 과연 옳은 걸까?

사회적 대타협 차원에서 나온 게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이다. 수출로 이익을 얻은 기업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출연해 농어촌이 입을 피해를 보전하자 취지에서 마련됐다. [사진=HMM 홈페이지]

우리는 국가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대한민국은 수출해야 먹고 사는 나라다, 그래서 고부가가치 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화학 등 경쟁력 있는 수출 기업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해 관세 철폐 등 무역장벽을 낮춰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데 농업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국가 전체가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농업인들은 이해하고 좀 참아줘야 한다.” 등등. 이런 논리가 ‘관세 철폐와 시장 개방’을 대하는 국민 일반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몰린 농업계는 저항했다. 농업대국의 값싼 농산물에 맞서기엔 우리 농업의 경쟁력은 부족했다. 농업은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안보산업이기 때문에 붕괴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도 최대한 우리 농업에 피해가 없도록 농업시장 개방과 품목에 제한을 두고 협상에 임했다. 공부 잘하는 장남(수출기업)이 더 잘되기 위해 동생(농업)이 희생하는 게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문제의식도 제기됐다.

그래서 사회적 대타협 차원에서 나온 게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이다. 수출로 이익을 얻은 기업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출연해 농어촌이 입을 피해를 보전하자 취지에서 마련됐다. 2015년 한중 FTA 발효를 계기로 2017년 국회에서 관련 법률까지 제정하며 조성하기 시작한 이 기금은 매년 1천억 원 씩 10년간 1조 원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성된 기금은 농어민 복지증진 및 교육장학 사업, 농어촌 활성화 사업, 공동협력 사업 등을 추진하는데 쓰인다.

국민의힘 소속 정점식 의원은 “대기업들이 FTA 체결로 상당한 수혜를 보고 있지만 농어촌 발전을 위한 기금 출연에는 인색한 것이 현실”이라며 “국정감사를 통해 기금출연 실적이 부족한 기업들의 증인을 불러 협력 구조를 분석하고 기금 출연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2019년 농해수위 국정감사 현장 [사진=이병로 기자]

그런데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매년 나오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15일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경남 통영·고성,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은 “2021년 국정감사를 앞두고 올해 8월까지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성액 현황을 분석해 보니 계획대비 30%에도 못 미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정점식 의원의 분석에 따르면,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은 2017년부터 2021년 8월까지 4년 8개월 동안 1293억 원을 조성했다. 매년 1천억 원 조성이 목표였으니 올해까지 5천억 원을 모았어야 했다. 진척율은 25.9% 수준으로 당초 목표의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친다. 더욱 한심한 것은 기금을 출연한 주체들이다. 정부가 공기업 경영 평가에 동반성장 평가지표를 반영하면서 공공기관이 909억원(70.3%)을 출연했다.

반면, 민간기업은 381억원(29.5%)을 출연했다. 정부 평가를 잘 받기 위한 공공기관의 출연이 없었더라면, 기금 출연 진척율은 한 자리수로 떨어질 뻔했다. 당초 민간기업 등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한다는 기금조성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고 있다. 즉, FTA로 수혜를 받을 기업들이 농어업을 도와 상생하겠다고 약속을 했다지만 이걸 지키는 기업들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정점식 의원은 “대기업들이 FTA 체결로 상당한 수혜를 보고 있지만 농어촌 발전을 위한 기금 출연에는 인색한 것이 현실”이라며 “국정감사를 통해 기금출연 실적이 부족한 기업들의 증인을 불러 협력 구조를 분석하고 기금 출연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 의원은 “기업 임원들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해 기업 흠집내기라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라며 “하지만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코로나19와 수입 농수산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우리 농어민, 농어촌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 좋은 대비가 있다. 지난 8월 24일 삼성그룹은 바이오제약 등 신사업에 향후 3년간 240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난 지 약 2주 만의 일이다. 또 얼마 뒤 9월 14일 열린 ‘청년희망ON 프로젝트’에서 삼성그룹은 향후 3년 간 총 7만개의 청년 일자리 만드는 사회공헌 계획을 발표했다. 행사에 참석한 김부겸 총리도 “국민의 기업다운 삼성의 과감한 투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치켜세웠다.

실9월 14일 열린 ‘청년희망ON 프로젝트’에서 삼성그룹은 향후 3년 간 총 7만개의 청년 일자리 만드는 사회공헌 계획을 발표했다. 행사에 참석한 김부겸 총리도 “국민의 기업다운 삼성의 과감한 투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치켜세웠다. [사진=국무조정실]

삼성이 대규모 투자와 일자리를 만들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데 토를 달 이유는 없다. 다만, 정부 당국은 삼성이 이보다 앞서 합의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에 과연 얼마를 출연했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더 나아가 자유무역협정으로 이익을 본 기업들은 왜 자율적이라는 이 합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지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늘 희생을 강요당했던 동생(농업)들은 형님(수출대기업)의 현란한 투자 발표에 박수를 칠 수 있을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귀남이와 후남이를 나누고 차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과 삼성 걱정이라는 우리는 그 걸 입에 달고 산다. 반면, 농산물 가격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빨리 수입해서 물가 안 잡고 뭐하냐고 정부를 닥달한다.  그 덕에 농가당 평균 연간 농업소득은 아직도 1천만원대 초반을 맴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코로나 19 이익공유제를 언급하며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좋은 사례로 소개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이 기금은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시혜적 성격의 기부금이 아니다. 이익을 봤으면 피해 본 측에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상식’에 근거한 상생기금이다. 농업인들은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똑같이 대해달라는 것일 뿐. 그동안 도시 노동자의 안정적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농산물 가격은 철저히 통제됐다. 수출기업의 교역조건을 좋게 하기 위해 농업대국들에게 국내시장을 내줬다.

이제 차별받고 희생한 형제들에게 학자금도 대주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용기도 줄 때다. 그게 장남과 부모가 해야 할 도리다. <아들과 딸> 마지막 편에서 어머니는 후남이를 붙들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귀남이가 기죽을까봐 너에게 못되게 했다“고 사과도 했다. 현실에서도 해피엔딩을 기대하면 욕심일까?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며 집권한 문재인 정부도 막을 내릴 시간이다. 이번 정부 마지막 국정감사에서 어떤 장면이 연출될지, 자못 궁금하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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