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농민이 진짜 농민 내쫓는 '그레샴의 법칙'

본질가치 낮은 악화(惡貨)가 제대로 된 양화(良貨)를 화폐시장에서 퇴출시키면 결국 그 시장에서는 악화가 석권하게 된다. 화폐에 대한 가치는 본질가치보다 낮아지므로 화폐로써의 기능을 상실한다. [사진=픽사베이]

16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그레샴은 “Bad money drives out good.”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낸다는 뜻이다. 국내에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로 알려져 있다. 약 300년이 지난 후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는 이를 인용해 '그레샴의 법칙'을 정립했다. 내용은 이렇다.

같은 액면가의 금화 A와 B가 있다. A는 순수 금화이고 B는 합금으로 된 저질 주화다. B의 소재 가치는 A보다 재질 가치가 훨씬 낮고, 당연히 B의 생산 원가도 A보다도 훨씬 싸다. 그러면 사람들은 남에게 지불할 때는 B를 이용하고 실질적인 가치가 높은 A는 자기가 보관하려고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장에서 A는 사라져 가고 B만 통용된다. 본질가치 낮은 악화(惡貨) B가 제대로 된 양화(良貨) A를 화폐시장에서 퇴출시킨 결과를 낳는다. 결국 그 시장에서는 악화가 석권하게 되면 화폐에 대한 가치는 본질가치보다 낮아지므로 화폐로써의 기능을 상실한다. 한마디로 돈이 똥 값되는 것이다.

최근 LH 공사 직원 땅투기 사건도 대표적인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된 사례다. LH 직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투자(?)에 나선 것은 법과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농지 시장에 거짓 거래, 즉 악화가 가득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들의 수법을 보면, 농사를 짓지 않을 것이면서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속여 농지를 취득한 게 핵심이다. 쉽게 말해 가짜 농민 행세를 한 것. 사실 이런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직장 동료, 상사-부하 사이에, 지인들 사이에, 심지어 인터넷 상에도 버젓이 전수되던 공공연한 비밀이다. 새삼 놀랍다고 설레발을 떠는 정치인과 언론을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농업계에서 수년 전부터 지적돼 왔기 때문이다. 농민도 진짜, 가짜를 가려서 봐야 하는 세상이 된지 오래다.

지난 11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위원장 이개호) 전체회의에서 출석한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여야 의원들로부터 “농민에게도 4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라”를 요구를 받았다. 여당 간사인 서삼석 민주당 의원은 “코로나19 피해를 본 113만 8천명의 농어가에 100만원씩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당 간사인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도 “농어가에 대한 보편적 지원으로 가구당 100만원 이상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전날 청와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도 “여야 합의가 있을 경우 반영하겠다”고 언급했다. 국회에서 추경안이 심사 중이니 농민들에게도 재난지원금이 지급될 것이라는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지난 11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위원장 이개호) 전체회의에서 출석한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여야 의원들로부터 “농민에게도 4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라”를 요구를 받았다.

만약 실현된다면, 코로나 19로 어려움에 빠진 농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은 ‘가뭄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농민이 누구인가는 짚어봐야 한다. 가짜 농민이 지원금까지 받고 뒤에서 웃는다면 진짜 농민은 허탈하다. LH 사태를 보고 있자면 이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사실 ‘농민’은 법적 용어가 아니다. 각종 정부 지원의 기준이 되는 ‘농사짓는 사람’은 ‘농업인’이다.「농업ㆍ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시행령에서는 농업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았다.

▲1천제곱미터 이상의 농지를 경영하거나 경작하는 사람 ▲농업경영을 통한 농산물의 연간 판매액이 120만원 이상인 사람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6조제1항에 따라 설립된 영농조합법인의 농산물 출하ㆍ유통ㆍ가공ㆍ수출활동에 1년 이상 계속하여 고용된 사람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제1항에 따라 설립된 농업회사법인의 농산물 유통ㆍ가공ㆍ판매활동에 1년 이상 계속하여 고용된 사람

생각보다 농업인의 범위가 헐겁다. 약 300평의 농지를 가지고 있거나, 연간 120만원 어치 농산물을 팔거나, 90일 이상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농업인‘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농민 코스프레를 할 수 있는 법 기준이다. 사실 이 기준을 너무 높여 놓으면 ’농업인’ 수가 대폭 줄 수 있다. 가뜩이나 고령화로 농업인이 줄어드는 농촌과 지자체를 생각하면 시행령의 취지도 이해는 간다. 특히 귀농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농업인의 지위는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다. 문턱을 낮춰도 농사지으려는 사람이 없으니 각종 지원을 통해 새로운 ‘농업인‘을 만들자는 게 현재 귀농정책의 요지다.

매년 증가하던 귀농인구가 최근 들어 감소했다. 2020년 6월 발표된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9년에 귀농한 신규 귀농가구는 1만 1422가구로 전년 대비 4.5%, 감소했다. 농촌으로 이사는 왔지만 농사는 짓지 않는 귀촌가구도 31만 7660가구에 머무르며 전년 대비 3.3% 감소했다. 아무리 당근을 제시해도 아직 도시민들이 ‘농촌 살이‘에 겁을 낸다. 해법은 있다. 진짜 농민을 키우고 그들에게 가짜 농민에게 갈 각종 혜택을 몰아주는 것이다.

독일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일단 농민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농업전문학교를 입학해 졸업해야 하고 현장에서 몇 년 동안 실습한 뒤에 농부 고시에도 합격해야 한다. [사진=독일연방식품농업부 홈페이지]

독일은 자격증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전에 5년제 실무학교를 거쳐 3년제 직업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그 후 농업국 부설 농업전문학교 3학기를 수료하고 국가시험에 통과해야 농민자격이 부여된다. 이들은 농사를 지으며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받고 65세면 은퇴해 연금을 받는다. 독일 농민이라고 편하게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우리 농민과 똑같이 땀 흘리는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차이점은 삶의 질이 보장된다는 점.

우리 농식품부가 올해부터 추진하는 ‘살아보기’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참가자는 마을별 프로그램을 통해 영농기술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일자리 체험, 주민교류, 지역탐색 등 농촌 전반에 걸친 경험을 한다. 참가자에게는 별도 참가비 없이 최장 6개월의 주거 및 연수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월 15일간 프로그램에 성실히 참여하면 30만원의 연수비도 지급한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을지, 다른 일과 농사를 병행하는 '반농반X(半農半X)'를 할지, 아니면 귀촌만 할지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독일식이든, 우리식이든 핵심은 진짜 농민을 키워내는데 있다. 그래야 ‘농민‘의 가치가 올라가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이제 양화(진짜 농민)로 악화(가짜 농민)을 내쫓을 때다. 정부는 LH사태 수습 과정에서 가짜 농민이 진짜 농민을 허탈하게 만드는 부조리를 엄중히 다뤄주길 간곡히 요청한다.

이번 일로 대통령의 양산 사저가 입방아에 올랐다. 농민 아닌 사람이 농지를 매입했다는 정치 공세에 문재인 대통령은 “좀스럽고 민망하니 그만들 하라”고 일갈했다. 대통령의 주장이 더 큰 힘을 받는 방법이 있다. 퇴임 후 진짜 농민이 되는 것. 그러면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머쓱해 질 것이다. 한술 더 떠 귀농귀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수많은 농민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 주길, 대다수의 국민들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가짜를 내쫒고 집권한 정권의 수장답게, 마무리도 진짜임을 증명할 수 있는 대통령이기에 드리는 고언이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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