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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기 대가 미국의 신묘막측한 외교술연간 5만톤 식량지원하는 대한한국 정부... 적극적 원조로 국익 챙겨야

유럽과 한국 경제는 닮은 구석이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다른 나라의 원조로 재건했다는 점이다. 그 배후에는 20세기 최강대국 미국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며 완전히 망한 나라들을 돕는다. 대외 개방 경제를 통한 새로운 국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소련과의 체제 경쟁을 통한 국익 보호를 위해 미국은 막대한 자금을 이들 지역에 쏟아 부었다. 이를테면 ‘퍼주기의 원조‘인 셈이다. 왜 그랬을까? 해답을 찾으려면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면서 독립국가가 됐다. 이후  1823년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연두교서를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노선을 밝혔다. 먼로는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미국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미국 역시 유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미국과 아메리카 대륙은 알아서 살테니, 유럽도 간섭하지 말라는 ‘고립주의’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이를 먼로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신생국 미국은 유럽을 통제할 국력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이치였다.

1823년 먼로 대통령이 먼로 독트린이 선언하고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동안 고립주의를 견지했다. 그러다가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밝혔다.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명실상부한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당연히 자국 중심의 전후 복구와 세계 질서 재편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승국인 소련이 눈엣가시였다. 특히 소련은 종전 후에도 동유럽에 병력을 철수하지 않는 등 팽창정책을 노골화했다.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른바 봉쇄정책을 표방하는데 이게 트루먼 독트린이다.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고 미국과 동맹을 원하는 국가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유럽 경제 부흥 계획인 마셜 플랜도 트루먼 독트린의 산물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마셜 플랜을 승인하는 '대외원조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미국 의회 도서관]

미국 대외 원조의 서막은 마셜 플랜이 열었다. 1947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마셜이 제창했던 이 정책의 정식 명칭은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부흥시켜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소련의 확장 정책을 차단하는 목적 하에 기획됐다. 미국은 유럽에 1947년 7월부터 4년간 총 130억 달러에 해당되는 경제적·기술적 지원을 해주었다. 20세기 말 가치로 환산하면 약 13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00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마셜플랜의 효과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맞았다. 국민들은 전쟁전보다 더 부유한 삶을 살게 됐다. 이를 통해 유럽은 미국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높아지면서 소련과 맞서는 동맹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이탈리아, 독일 등 적국이었던 나라들에게도 원조를 함으로써 세계 대전 같은 대규모 분쟁의 씨앗을 원점부터 제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생활수준이 높아진 유럽에 미국산 제품을 더 팔수 있게 되면서 미국 기업들의  성장과 경쟁력을 견인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마셜 플랜도 입안 당시 미국의 의회, 특히 야당인 공화당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당장 나타나는 효과도 없는데 국민의 혈세를 왜 이역만리 유럽에 투입해야 하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퍼주기 논쟁이 벌어졌던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진영을 단결시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 안에 두면서 세계 최강 패권국가가 되는데 초석을 놓는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퍼주기가 복덩이가 됐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출신 트루먼의 승부수가 통한 역사적 장면이다.

반면, 유럽에 신경 쓰던 미국은 지구 반대편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는 대응이 늦었다. 소련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중화민국 장개석 정부가 무너졌다. 1949년 중국 대륙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석권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어 1950년에는 소련 군정 하에 있던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한국전쟁이 터진다. 갑자기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진영 간 각축장이 된 것이다.

미국대외원조물자발송협회(CARE,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Everywhere)원조에 의한 국민아동 급식 광경 [사진=국가기록원]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은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 재건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47년 맺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에 따른 원조는 전쟁으로 중단됐지만 1954년부터 본격 재개된다. 1960년까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액은 총 약 28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산업을 일으키고 안보를 유지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55년 맺어진 ‘한미잉여농산물협정‘으로 밀가루, 우유가루 등 미국 농산물이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 협약은 미국 측 잉여농산물을 한국 통화로 구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남아도는 농산물을 한국이 한국 돈으로 사도록 해주고 그 대금을 미국이 빌려주는 형식이었다. 미국의 차관은 한국은행의 별도 계정에 넣어 한국정부가 임의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들여온 미국 농산물은 대부분 국내에서 판매토록 했다. 그 대금의 80%는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군의 유지비용으로 사용됐다. 미국 허락 없이 해외로 되팔거나 판돈을 한국 정부가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다. 미국은 남아도는 농산물을 한국에 팔아 폭락을 막고, 어차피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으니 그 판매대금의 일부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최적의 협약을 받아들 수밖에 없던 당시 한국정부의 처지가 딱하다. 어찌됐든 이로써 전후 대한민국은 아사(餓死)의 경계선에서 극적으로 벗어난다. 가난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때부터 미국을 먹을 것을 공짜로 준 고마운 나라로 여기게 됐다. 미국은 든든한 우방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민심을 얻은 게 가장 큰 수확이다.  

21세기 한국은 먹거리 걱정이 없는 나라다. 오히려 남아도는 쌀과 버리는 음식물 처리에 골머리를 썩는다. 미국의 수준은 아니지만, 이제 남는 식량이 있다면 해외원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 정부는 매년 식량원조를 하고 있다. 올해도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6개국에 총 5만 톤 규모의 쌀을 원조할 계획이다. 기존 예멘,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외에 라오스와 시리아를 추가한다. 잘한 일이다. 헌데 수혜국에 북한은 없다. 못주는 원인을 탓하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전쟁의 위험을 머리에 이고 살 순 없지 않은가.

이를 위해서 미국의 신묘막측한 외교술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한때 적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현금을 살포해준 마샬 플랜도 처음에는 퍼주기라고 욕을 먹었다. 미국은 핵폭탄보다 무서운 게 민심을 얻는 것임을 잘 알고 주도면밀하게 실천해 왔다. 국익을 위한 그 영리함과 담대함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예멘 아비안(Abyan)주의 수도 지니바르시(Zinibar)시의 구호물자 분배센터 [사진=WFP]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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