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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문학] 강희진 관장의 馹迅隨筆(일신수필)두 번째 토종 이야기, '홀아비 밤콩은 그리움이다.' (1)
한국토종씨앗박물관장 강희진

전화가 왔다. 매우 죄송하고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데면데면한 듯 본론은 얘기하지 않고 변죽만 올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벌써 두 번째 전화였다. 씨앗이 필요한 것이다. 박물관은 3월과 7월 정기 씨 나눔을 제외하고는 일일이 나눔을 하진 못한다. 그럴 때는 그냥 선수 치고 나가는 것이 편하다.

"무슨 씨가 필요한지 모르지만...." 
"잠깐만요. 제 말씀을 먼저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시작하여 듣게 된 사연.

그녀는 홀아비 밤콩을 애타게 찾는 아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전화를 했다. 조금만 주시면 돌아오는 어버이날 밥 한 끼라도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어머니가 홀아비 밤콩을 그렇게 좋아 하셨단다. 아버지가 어머니 생각만 나면 홀아비 밤콩 이야기를 하시니 밥 한 끼는 해드리는 것이 도리 아니냐는 것이었다.

효심이 가상하기도 하고 사실은 그 사연이 궁금하여 홀아비 밤콩 한 줌을 들고 게재에 나선 것이 포천 씨앗수집 여행이었다. 가는 김에 포천 군내면에서 오랫동안 홀아비 밤콩을 지키는 이유신 할머니도 찾아볼 겸, 겸사겸사 옮긴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찾은 이 할머니는 농사는 놓고 지금은 집 앞에 심어 놓은 꽃만 가꾸고 계셨다. 몸이 몹시 아프셨을 때 농사를 놓았으니까 벌써 3년이나 됐다고 했다. 당연히 홀아비 밤콩의 씨는 이미 잃어버렸다 했다. 안타까웠다. 10여 년 전에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홀아비 밤콩을 심으셨던 분이었다고 했다. 그냥 돌아서기가 짠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내가 위로할 말을 건낼 정도의 숙기가 없을 즈음에서 내가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나를 붙잡는다. 할머니는 혹시나 하고 얘기 해준다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50 여년을 이어온 종자를 잃는다는 게 서럽고 아쉬워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건너 친구 김영환 할머니께 맡겼는데, 혹시 모르니 가보란다. 그동안 자기도 맡겨만 놨지 한 게 없어 미안해 가보지도, 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찾은 김영환 할머니! 내가 충청도에서 왔다니 기다리던 조카사위로 착각하고 반갑게 대청으로 들인다. 조카사위가 아니면 어때! 다리가 불편하고 눈이 어두워 늦게서야 알아챈 할머니는 낯선 우리를 다짜고짜 손을 잡고 들어간 것이다.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 그녀에게서 홀아비 밤콩을 찾았다.

김영환 할머니. 그녀는 친구와 약속대로 친구가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 홀아비밤콩을 삼년 동안 지켰다. 친구가 얼마나 아끼는지 혹여 맡고 있는 동안 튀기가 나올까봐 다른 콩은 심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제 돌려줄 때가 왔다고 한다. 주섬주섬 콩을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조그만 봉지는 우리 것이고 큰 보자기는 가는 길에 이유신 친구에게 전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유순 할머니께로 다시 갔다. 그 사실을 알리기도 해야겠고, 이렇게 질긴 인연을 가지고 있는 홀아비밤콩을 50여 년 전이라 하지만 도대체 언제 어디서 씨를 구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갑자기 홀아비 밤콩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심지도 못할 것 가지고 왔다고 괜스레 타박만 하셨지만, 그 타박 속에 짙은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김영환 할머니가 지킨 홀아비 밤콩

"저기, 벌말의 새마을 지도자 박광태라는 분이 있는데, 거기서 얻었지. 내가 젊었을 때는 근동에 많이 심었는데, 그 집 께 유난히 맛이 좋았거든."

우리는 주소도 없이 벌말 동네를 다 뒤지며 헤매다 극적으로 길가에서 만난 박광태 할아버지. 어디 앉지도 못하고 새마을 도로에 서서 그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없어! 근데 당신들은 그 콩이 있수? 있으면 나도 좀 주시구랴. 나도 눈 빠지게 찾고 있으니까."

벌말 박광태 할아버지는 정말 새마을 지도자였다. 지금도 자식에게 물려주기는 했지만, 버섯 공장을 세워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새마을 지도자 시절 한때는 마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고 했다.

콩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연천 파주 포천 지역이 콩 주산단지였는데, 연천 파주 지역은 1913년 경 일제가 장단토종을 가지고 육종한 장단 백목이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만해도 포천지역에는 홀아비밤콩이 대세였다. 워낙 밥맛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잘 살아보자는 일념 아래 의욕을 가지고 소득사업에 매달릴 무렵 국내에서 육종한 '대원'이라는 신품종이 다시 마을에 들어왔다. 

콩이 주 소득원이었던 지역인 터라 새마을 지도자인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홀아비 밤콩 대신 신품종 심기를 강권하다시피 했다. 콩을 많이 심던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홀아비 밤콩 종자를 버리듯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는 솔선수범도 보였다. 그때 아마 이유신 할머니도 얻어 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자 점점 마을에는 ‘대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소득도 나아졌으니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엠병할! 다른 말을 그렇게 잘 들지 들?"

그는 그래도 그럴 줄 몰랐다고 한다. 누군가는 한쪽에 홀아비 밤콩을 심고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들밥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밥밑콩으로 들어있었으니 ‘뒤 켠 쪽밭에는 즈덜 먹을 콩은 심는 줄 알았다’고 한다. 홀아비밤콩은 사람들이 콩 바심을 할 때도 기계를 쓰지 않고 앞마당에 널어 꼭 도리깨 짓을 해서 털었다고 한다. 기계로 털면 편하기는 하지만, 마치 콩 맛까지 털릴까 해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콩이 보이지 않더란다. 소득은 얻었지만 밥상머리 밥맛을 잃었다. 그래서 자신도 몇 년 전부터 홀아비 밤콩을 찾기 시작했는데 기어코 찾지 못했으니 혹시 찾으면 연락을 달란다.

<다음호에 계속>

이광조 기자  lgj@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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