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일을 냈다. 연일 계속되는 대남 비방전 끝에 6월 15일 오후 2시 50분 경 개성공단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2018년 우리 세금 170억 원을 들여 만든 이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폭풍으로 뒤에 서있던 개성공단지원센터의 유리창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처참했다. 산산조각이 난 건물 잔해와 무너져 내리는 유리창 파편들. 이것들과 함께 가까스로 만들어 놓은 남북 관계도 깨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북핵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손을 잡던 게 까마득히 먼 옛날 얘기 같다. 북한 조선중앙TV는 “북남관계 총파산의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게 현실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무엇보다 북한의 무책임하고 무례한 처사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 작년 북미 하노이회담이 결렬되고 난 후, 우리 정부의 안일한 대응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남북관계는 순풍에 돛을 단 듯 했다. 

북미 관계 정상화에 이어 북한 제재도 순차적으로 풀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 경협을 시작으로 긴장완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향한 프로세스는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북한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조롱하기라도 6월 15일에 맞춰 일을 벌였다. 이번 처사로 그간 우리의 평화를 향항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정부는 지난 15일 북측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일방적으로 폭파한 것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했다. NSC 김유근 안보실 1차장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KTV 화면 캡쳐]

누구의 잘못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북한에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북한을 움직이게 하는 열쇠는 미국과 한국 정부에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특히 미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지나친 눈치보기도 비난받고 있다. 유엔 제재의 핵심은 북한에 ‘벌크캐시’ 즉 현찰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우리 정부도 북한에 현금 다발을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미국은 하노이회담이 아무 성과 없이 끝난 후 남한이 독자적으로 대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이른바 한미간 워킹그룹 (Working group, 실무자 협의체)를 만든 것이다. 대북 문제는 모두 여기서 협의하자고 미국은 제안했고 우리는 그걸 받아들였다. 이로써 미국이 반대하면 남한이 독자적으로 북한에 대한 정책을 협의하거나 결정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은 ‘브레이크’를 만들어 놨다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족쇄’가 채워진 셈이다. 우리 정부의 답답한 심정도 이해는 가는 대목이다.

문제는 안이한 자세와 소통의 부재에 있다. 관련 부처들이 '유엔제재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일이다. 당장에 되는 일은 없지만 공식-비공식, 정부-비정부 부문에서의 끊임없는 대화 시도와 교류가 제대로 있었는지도 점검해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1과 0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중간 어딘간에 있을, 보이지 않는 회색지대에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번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업계도 남북 협력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작년에 북한에 이어 남한에도 창궐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공동 조사와 방제도 그 중 하나였다. 북한은 작년 5월 30일 중국 접경지역인 자강도 우시군의 북상 협동농장 1곳에서 돼지열병이 발병했다고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신고했다. 몇 달 후 9월 24일 국회정보위에서 국정원은 '북한 지역에서 ASF가 상당히 확산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북한 측에 방제 협력을 제안했으나 무산됐다. ‘하노이 노딜’ 이후 이미 남북간 대화 분위기가 급랭하고 있는 상황을 의식한 북한의 비협조가 원인이었다.

이후 우리 땅에도 ASF가 창궐하게 됐다. 우리 불끄기에 급급했다. 6월 현재까지도 접경지역 멧돼지 사체에서는 ASF 바이러스가 검출되는데 북한과의 공조는 언감생심이다. 작년 ASF를 막기 위해 정부는 예방활동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공항, 항만 등 외국과의 접촉지점에 대한 방역과 교육을 강화하고 처벌도 했다. 하지만 막지 못했다. 

아직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한에서 월경한 ASF 감염 멧돼지가 숙주가 됐으리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멧돼지에게는 국경과 국적이 없다. 어디서 온지도 모를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우리는 44만 마리나 되는 엄청난 돼지를 살처분 해야 했다. 앞으로 북한 측을 통해 유입되는 가축전염병이 발생해도 현재로써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산림청은 6월 3일 경기 파주에서 ‘남북산림협력센터’ 준공식을 개최했다. [사진=산림청]

산림분야는 어떤가? 알다시피 북한 산림의 황폐화는 심각하다. 산에 나무가 있어야 숲이 만들어지고 그래야 농사도 된다. 농업이 안정되어야 국가 경제 발전을 시도할 수 있기에 북한은 무엇보다도 남한에 산림 분야의 지원을 원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양묘장을 만들기로 했다. 당연히 북한의 산하에 심을 묘목을 생산해내기 위함이었다. 작년 9월 4일 착공한 남북산림협력센터는 올해 6월 3일 완공됐다.

이날 준공식에서 산림청 조병철 남북산림협력단장은 “산림협력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유일한 물자 협력의 실질적 성과를 내는 분야”라면서, “남북산림협력센터를 거점 삼아 보다 수준 높은 산림협력을 차질 없이 지원해 남북관계 발전의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불과 2주 전 일이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산림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은 2주 후 남북협력센터 폭파를 상상이나 했을까? 그 전에 남북산림 협력을 위한 북측 인사와의 접촉은 있긴 했을까? 센터라는 건물은 교류를 상징한다. 하지만 실질적 소통이 없다면, 그 건물 속을 채울 남북 임업인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제 일은 벌어졌고 수습할 일만 남았다. 그간 북한의 거친 비아냥에 꾹 참아왔던 청와대도 이제 태도를 바꿨다. 직설적으로 북측 언사를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도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당분간 냉각기는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냉각기 이후다. 군사적 충돌이라는 파국으로 갈지, 다시 화해와 협력의 장을 열지, 전적으로 남한 정부의 능력에 달렸다.

답답한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잃을 게 더 많은 남한이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핵심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자세와 소통에 있다. 우리 농업이 그 마중물을 하기에 딱 맞다. 먹는 문제를 건드리면 인도적 차원의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지난 17일 사의를 표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에 대한 여권 내 책임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곧 분위기를 일신할 외교-통일-안보 라인 당국자들에게 고한다. 무엇보다 먼저 농업을 들여다보라고.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도 많으니 시작도 쉽다. 무엇보다, 같이 먹어야 말도 나오는 법이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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